김종서 (13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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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서(1383년)는 고려 우왕 9년에 태어나 조선 단종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인물이다. 140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함길도절제사로 육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으며, 단종 즉위 후 좌의정으로 단종을 보필했으나 계유정난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사후 숙종 때 복권되었으며, 충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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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138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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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종서 |
한자 이름 | 金宗瑞 |
일본어 가나 표기 | きん そうずい |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 キム・ジョンソ |
로마자 표기 | Kim Jong-seo |
별명 | 백두산 대호(白頭山 大虎, 백두산 호랑이) |
자 | 국경(國卿) |
호 | 절재(節齋) |
시호 | 충익(忠翼) |
출생일 | 1383년 |
출생지 | 고려 양광도 공주목 |
사망일 | 1453년 11월 10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묘소 | 절재 김종서 선생 묘(2012년 7월 1일 이후 현재의 대한민국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소재) |
본관 | 순천(順天) |
분야 | 성리학 |
가족 관계 | |
부모 | 김수(부), 성주 배씨 부인(모) |
친인척 | 김태영(친조부), 배규(외조부), 윤원부(장인) |
형제 | 형: 김종한(金宗漢, 1379년~1446년), 제: 김종흥(金宗興, 1394년~1449년) |
배우자 | 본실 파평 윤씨 부인, 측실 2명 |
자녀 | 김승규(장남), 김승벽(차남), 김승유(삼남), 김목대(서자), 김석대(서자) |
관직 및 경력 | |
학력 | 1405년 식년문과 동진사 13위 급제 |
직업 | 문신, 무신, 군인, 정치인, 시인, 문장가 |
주요 경력 | 우의정(1451년 10월~1452년 12월)을 역임 |
이조정랑 재임 기간 | 1426년 4월 ~ 1433년 5월 |
예조판서 재임 기간 | 1441년 11월 ~ 1446년 1월 |
좌의정 재임 기간 | 1452년 10월 ~ 1453년 11월 |
복무 기간 | 1414년 ~ 1453년 |
계급 |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영집현전 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신(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領集賢殿經筵事 監春秋館事 世子傅臣) |
지휘 | 조선 육군 |
참전 | 6진 개척 |
근무 | 함길도 도절제사, 평안도 도체찰사 |
임금 (이조정랑) | 세종 |
임금 (예조판서) | 세종 |
임금 (좌의정) | 단종 |
당파 | 관학파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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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려 말 양광도 공주목에서 출생한 김종서는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사간원우정언,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역임했으며,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1433년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장했고, 1435년부터 1440년까지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등을 겸직하며 북방 경계를 수비했다.
1451년(문종 1)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 편찬을 감수했다.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암살되어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5]
2. 1. 생애 초반
1383년(고려 우왕 9년) 양광도 공주에서 아버지 김추(金錘)와 어머니 성주 배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1] 아버지 김추는 1396년(조선 태조 4)에 김수(金陲)로 이름을 개명했다.[1] 어머니 성주 배씨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7년부터 1372년까지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관료 배규(裵規)의 딸이다.[1]2. 2. 관직 생활과 업적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간원우정언,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역임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1433년 좌대언으로 이부지선(吏部之選)을 관장하는 특명을 받기도 했다.[1]같은 해 12월 함길도절제사가 되어 7~8년간 북변에서 6진을 개척,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 1435년에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1440년까지 7년간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맡았다. 이후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의금부제조가 되었고, 승문원제조도 겸했다.[1]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지방의 목마장과 방마(放馬)가 가능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 겸 판예조사를 역임했다.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심정하였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지자 평안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에 소환되었다.[1]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1453년(단종 1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였다.[1]
6진 개척의 수장이자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로서 면모를 보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인해 흔히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2]
2. 3. 학문적 업적
김종서는 육진 개척의 수장이자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였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였다. 흔히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문과에 급제한 문인으로 강직하고 엄정하며 밝은 학자이자 유능한 관료였다.[3] 강직하고 엄정한 면모는 사헌부, 사간원에서의 이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육진 개척 당시 부관이었던 박호문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을 뻔했으나, 세종에 의해 곤장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4] 육진 개척 이후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임한 것은 그가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안평대군의 시회에 참석하여 '몽유도원도시축'에 오언고시를 남겼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간행에 힘썼다. 1451년에는 좌찬성·지춘추관사가 되어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였고, 1452년에는 《세종실록》을 감수하였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수양대군(후의 세조) 및 이미 수양대군에게 투항한 정인지 등과 대립하여 1453년 계유정난으로 아들들과 함께 참살되었고, 《고려사》 편찬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찬자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2. 4. 계유정난과 죽음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비롯한 주요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김종서는 이 정난의 첫 희생자가 되었는데, 수양대군에게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암살(살해)되었다.[5] 그는 단종을 보필하는 좌의정이었으나,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수양대군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수양대군은 어린 국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병권을 장악한 김종서를 제거 대상으로 지목했다. 김종서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결국 수양대군의 야망을 막지 못했다.[5]1678년(숙종 4년)에 김종서의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년)에 복관되었다. 그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다.
2. 5. 사후
수양대군은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김종서를 지목했다. 김종서는 어린 국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종서는 계유정난 때 첫 번째로 제거되었는데, 1453년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암살당했다.(향년 71세)[5]그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舊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다. 생가터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번지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되어 공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의 '장군(將軍)'은 공주시 의당면 일부와 장기면 일부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김종서를 가리킨다. 의당면에는 그의 생가터가 있고, 장군면에는 그의 묘가 있는 데서 유래한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김종서의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송준길의 7대조이자 송시열의 8대조인 계사(繼祀)는 판관을 지냈으며, 김종서의 동생 김종흥(金宗興)의 딸과 혼인했다.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공주에 숨어 있던 집안이다. 순천 김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요년(遙年)과 순년(順年)을 두었다. 계사의 자손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요년과 순년 형제에서 갈라진다. 요년의 5대손이 송준길이고, 순년의 6대손이 송시열이다.[5]
3. 6진 개척
野人과의 마찰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세종은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였다. 김종서는 흉년으로 국내 문제 해결에 급급했던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1]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를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회령, 경원, 종성, 온성에 진을 설치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3. 1. 여진족과의 갈등
남부 만주 지방에는 만주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하여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 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김종서는 당시 백성들의 흉년으로 인해 국내 문제 해결에 급급하는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1]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3. 2. 6진 개척 과정
남부 만주지방에는 만주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하여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흉년으로 인해 국내문제 해결에 급급하는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 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3. 3. 6진 개척의 의의
만주족들은 남부 만주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 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흉년으로 인해 국내 문제 해결에 급급하는 조정을 반박하며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세종 15년(1433년) 평안도 지역에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탈에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하여 동년 4월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 15,000명을 동원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정벌시키면서 압록강 유역을 평정시켰다.
이후 동년 10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알목하의 추장인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죽는 등 내부적인 여진족의 분열이 있었는데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4. 평가와 비판
세종은 권제, 안지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흡하다고 보고 1449년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다시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2년 뒤 완성된 《고려사》 편찬에는 집현전 출신 관료들이 주로 참여하였는데, 김종서는 집현전 출신이 아님에도 이들을 지휘하여 편찬 책임을 맡아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4]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편년체로 된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였고,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이듬해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 악보, 지리지, 칠정산내외편 등 전문적인 자료가 실리도록 하였다.[4]
4. 1. 긍정적 평가
세종 때 6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태종, 세종, 문종, 단종을 모신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3]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였으며,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개척에서 이룩한 공로로 인해 흔히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강직하고 엄정하며 밝은 문인이자 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였다.[4]長白山|장백산|장백산중국어에 기를 꽂고 豆滿江|두만강|두만강중국어에 말을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가 사나이가 아니겠느냐?
어찌하랴, 凌練閣|능연각|능연각중국어 위에 누구의 얼굴을 그릴 것인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밝은 달은 눈 속에 차가운데,
만리변성에 하나의 긴 칼을 짚고 서서,
긴 바람과 큰 함성에 거칠 것이 없구나.
4. 2. 비판적 평가
단종 즉위 후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 의정부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김종서의 위세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어린 국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병권을 장악한 김종서였고, 결국 계유정난 때 첫 번째로 제거되었다.김종서는 태종과 세종, 문종, 단종을 모신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위세는 웬만한 권신들도 잡지 못할 만큼이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호령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권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세종이 세손(단종)을 정사에 능한 원로대신에게 위탁하려는데 황희는 이미 은퇴를 했고 아흔 살의 고령이라 김종서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황희는 이 때를 내다보고 김종서를 길렀었으나 정치를 무리하게 할 것을 생각치 못하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위에 좌상'이라는 말도 있었다. '황보인이 조상의 묘(墓)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갈 때 전송하는 자들이 구름과 같이 많았으나, 김종서가 갈 때보다는 많지 않았다'라는 기록과 사위와 아들이 '특진'이라는 제도 때문에 승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종서의 섭정은 황보인과 정분 등 당시의 재상들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3정승 체제에서 제 뜻을 펼치기 어려운 정치구조로 됐을 만큼 세력을 잡고 있었다. 소장파 관료 즉, 신숙주나 박팽년, 성삼문 등의 불평도 있었으나, '대간이 감히 대신을 능멸하니 참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김종서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 등은 전혀 없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쓴 단종실록에서도 그가 서대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조차 보이질 않는다. 이런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공인으로서 절도를 잘 지켰음을 보여준다.
4. 3. 종합적 평가
김종서는 육진 개척의 수장이자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였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였다. 흔히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직하고 엄정하며 밝은 문인, 학자이자 유능한 관료였다. 강직하고 엄정한 면모는 사헌부, 사간원에서의 이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며, 육진 개척 당시에는 부관이었던 박호문의 모함으로 신임을 잃을 뻔했으나 세종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1]세종은 권제, 안지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흡하다고 보고 1449년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다시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2년 뒤 완성된 《고려사》 편찬에는 집현전 출신 관료들이 주로 참여하였는데, 김종서는 집현전 출신이 아님에도 이들을 지휘하여 편찬 책임을 맡아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1]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편년체로 된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였고,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이듬해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세종실록》에 오례, 악보, 지리지, 칠정산내외편 등 전문적인 자료가 실리도록 하였다.[1]
단종 즉위 후 의정부서사제 아래서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김종서는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김종서라고 생각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그를 제거하였다. 이후 김종서는 1678년(숙종 4)에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1]
김종서는 태종, 세종, 문종, 단종을 섬긴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위세는 매우 컸으며, 의정부서사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호령하였다.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성장하여 권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황희는 김종서를 길렀으나, 그가 무리하게 정치를 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단종 즉위 후에는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고, '성상위에 좌상'이라는 말도 있었다.[1]
그의 섭정은 황보인, 정분 등 당시 재상들의 존재를 무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소장파 관료인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도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종서가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은 없으며, 《단종실록》에서도 그의 집이 호화로웠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정황들은 그가 엄청난 권력을 가졌음에도 공인으로서 절도를 잘 지켰음을 보여준다.[1]
5. 가계
6. 김종서를 다룬 작품
- 독재자에게의 길 수양대군의 야망일본어 (파천무한국어) (1990년 KBS, 이승재)
- 한명회 ~조선왕조를 이끈 천재 책사~ (1994년 KBS, 임동진)
- 왕과 비 (1998년 KBS, 조경환)
- 대왕세종 (2008년 KBS, 이병욱)
- 인수대비 (2011년 JTBC, 한인수)
- 왕녀의 남자 (2011년 KBS, 이승재)
- 뿌리 깊은 나무 (2011년 SBS, 최일화)
- 관상 (2013년 주피터필름, 백윤식)
6. 1. 드라마
- 《수양대군》 (1967년 KBS 배우:최불암)
- 《파천무》 (KBS, 1980년 배우:신구)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전운)
- 《파천무》 (KBS, 1990년 배우:이순재)
- 《한명회》 (KBS, 1994년 배우:임동진)
-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조경환)
- 《사육신》 (KBS, 2007년 배우:김수일)
- 《대왕 세종》 (KBS, 2008년, 배우:이병욱)
- 《공주의 남자》 (KBS, 2011년 배우:이순재)
- 《뿌리깊은 나무》 (SBS, 2011년 배우:최일화)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한인수)
- 《대군-사랑을 그리다》 (TV조선, 2018년 배우:윤승원)
- 《관상》 (2013년 영화) 주피터필름·백윤식
6. 2. 영화
- 세종대왕 (1978년, 배우:이순재)
- 칠삭동이의 설중매 (1988년, 배우:한지일)
- 관상 (2013년, 배우:백윤식)
- 파천무 (邦題:독재자에게의 길 수양대군의 야망일본어) (1990년 KBS, 배우:이승재)
- 한명회 ~조선왕조를 이끈 천재 책사~ (1994년 KBS, 배우:임동진)
- 왕과 비 (1998년 KBS, 배우:조경환)
- 대왕세종 (2008년 KBS, 배우:이병욱)
- 인수대비 (2011년 JTBC, 배우:한인수)
- 왕녀의 남자 (2011년 KBS, 배우:이승재)
- 뿌리 깊은 나무 (2011년 SBS, 배우:최일화)
- 관상 (2013년 주피터필름, 배우:백윤식)
7. 관련 문화재
김종서 유허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번지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되어 공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주시 의당면 일부와 장기면 일부 지역으로 구성된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의 '장군(將軍)'은 김종서를 가리키는 것이며, 의당면에 그의 생가터가 있고, 장군면에 그의 묘가 있는 데서 유래한다.
- 김종서 장군 묘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2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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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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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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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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